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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선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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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선요1

속제자는 무상-고-무아-부정-공이요 진제자는 상-락-아-정-여실불공이라. 속제를 견하면 진제를 증하니 이것이 다만 해밀선의 요지이라.

1) 무상관

먼저 일체 만유의 무상을 보라.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이름이 있는 것이나 이름이 없는 것이나 좋은 것이나 싫은 것이나 가까운 것이나 먼 것이나 긴 것이나 짧은 것이나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모두가 항상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절대적이지 않다. 작은 것이 장차 큰 것이 되기도 하고 큰 것이 장차 작은 것이 되기도 하며, 작은 것은 더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이 되며, 큰 것은 더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이 된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또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니, ‘꼭 그러하다’ 하는 항상하는 일정한 모양은 세상에 존재하지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머리 속에 고집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요, 세상의 진실된 모습이라 할 수 없으니, 이것이 부정한 관이요 여실한 관이 아니어서, 속제를 견하지 못하는 관이 된다. 만일 바른 사유와 견으로써 일체 만유의 무상을 본다면, 즉시 어떤 것이든 ‘꼭 그러하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어느 물질 어느 형상은 물론이요 어느 생각과 어느 마음에도 ‘의지하여 머물 바’란 본래로 없다는 것을 깨우친다. 이를 깨닫는 순간 마치 수천생 수만생 윤회하는 내내 지고 다니던 천근, 만근이나 되는 짐을 쑥 내려 놓는 것과 같아져서1, 몸과 마음이 단번에 가벼워져 세상살이에 걸림이 없게 되니, 이것이 바로 심해탈이다.

심해탈하면 다시는 무상한 속제에 미혹되지 않으니, 심해탈 이것이 오로지 항상하여 계속해서 속제를 견하게 하고 계속해서 진제를 증하게 하는 까닭이다.

  1. *더이상 서로서로 속이며 ‘꼭 그러해야 한다’하던 세상살이의 정답 같은 것은 내게 발붙일 곳이 없게 된다. 나는 오로지 내 길을 따라 나의 삶을 살아내면 될 뿐이니, 남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닌 이상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진리이다.

    i) 아주 실천적인 요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들도 세상살이에 대해 아무런 아는 바는 없다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아무 근거가 없는 수칙들을 천근 만근 지고 사느라 스스로 지각하지도 못한 새에 남들을 괴롭히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아무 견[정견]이 없다.

    ii) 견[정견]이 없기에 사람마다 감각과 느낌이 다르고 그에 따라 처한 입장과 인생 여정이 모두 달라진다는 사유[정사유]도 없는 것이다. 즉, 견이 일어나면 지켜야 할 바가 없으므로 집착할 것이 없어 저마다 다름을 사유하여 안다. 그리고 견과 사유가 있다면, 자기 고집을 갖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들도, 그냥 두어 왈가왈부할 필요 없음을 안다. 가장 고통을 겪는 것은 결국 남보다도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다가올 미래의 고통을 가엾게 여기며, 즉시 그 마음 자리를 떠나 해탈하라.

    iii) 소통되지 않는 고독감은 그에게 이미 과보로서 시시각각 주어지고, 그리고 다가오고, 있다. 그에게 다가올 고통의 인연에서 다만 멀리 떠나라. 자꾸 말을 섞고 행동을 섞으며 한 인연 덩어리로 응어리지지 말아라. 그 말 섞음과 행동 섞음은 내 업보가 되기 때문이다. 단단해져라 강해져라 아니, 견[정견]을 통해 마음을 덜어내고 마음을 편히 쉬어라. 무릇 쉬어야 강해진다. 그 쉼을 ‘득력처’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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